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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9.22 슘페터가 한국 창조경제를 논한다면

슘페터가 한국 창조경제를 논한다면

슘페터가 한국 창조경제를 논한다면...


조지프 슘페터 [ Joseph Alois Schumpeter ] 는 그의 역작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 ‘자본가’와 ‘기업가’를 구분한다.   자본가는 계층이지만, 기업가는 기능이다.   맑스는 계층으로서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와 그렇지 못한 노동자가 임금을 비롯한 재화의 분배를 놓고 충돌해 결국은 혁명을 통해 사회가 변화될 것이라 봤지만,   슘페터는 자본주의 안에 내재된 기능인 기업가의 창조적 파괴를 통해 자본주의는 끓임없이 다시 태어날 것이라 진단했다. 즉, 자본주의의 정체는 끊임없는 변화다.   슘페터가 그의 일생 동안 끊임없이 강조한 것처럼, 안정적 자본주의란 말 자체가 모순이다.



슘페터의 위 주장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면 통시적으로 그리고 동시적으로도 동일한 형태의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현대 자본주의의 본류인 미국의 경우를 생각해봐도 그렇다. 20세기 초반 카네기나 록펠러가 미국 경제를 좌지우지할 때의 자본주의와, 대공황을 지나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뉴딜 정책을 펼 때의 자본주의는 다르다.   전자가 대기업에 의한 국가경제의 독과점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그 역할이 국가로 대체된다.
자유로운 노동 시장과 자본 시장에 근거한 미국의 자본주의와, 상대적으로 국가에 의한 노동 시장과 자본 시장의 조율 정도가 높은 일본이나 독일의 자본주의도 다르다.   자본주의에 대해서 가장 날카로운 분석을 했다고 정평이 난 슘페터의 자본주의론의 핵심은 ‘자본주의는 진화하는 생물학적 조직에 가깝다’는 것이다.   혁신, 기업가정신, 그리고 미래를 담보로 사용할 수 있는 자본인 신용의 역동적 조합을 통해서 자본주의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환경에 맞춰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기업가란 구원자가 존재한다 해도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은 늘 위험에 놓여 있다.   슘페터의 관점에서 보면 그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간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자본주의란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부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허상이고, 그 부를 만들어내는 동력이 탐욕이기 때문이 아니다.   슘페터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부가 인류의 미래이고, 그 부를 만들어내는 동력은 근대사회의 합리성에 억눌리지 않은 개인의 기업가정신이라 봤다.
슘페터가 보는 자본주의의 진정한 위험은 경제가 아니고 사회다.   윈스턴 처칠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본주의의 내재적 악덕은 축복의 불평등한 분배이며, 사회주의의 내재적 미덕은 불행의 평등한 분배이다.   기업가는 이 자본주의의 내재적 악덕을 끓임없이 생산해내는 존재이고,   따라서 경제가 호황일 때는 질시의 대상이 되고 불황일 때는 원망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동시에 기업가는 중세의 왕과 영주의 사회적 지위를 계승했지만 그들과 같은 공고한 정치적 기반을 갖고 있지 않다.   영주의 기사와 농노와 달리, 기업의 관리자와 노동자는 기업가에게 봉급을 대가로 충성을 다하지 않는다.   기업가만이 자본주의를 새롭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으나, 기업가는 결코 대중적인 지지를 얻기는 쉽지 않은 종족이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지속가능하려면 경제뿐 아니라 정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이들 기업가와 대중과의 사회적 긴장을 완화하고 새로운 사회적 합의에 근거해 함께 전진할 수 있는 정치적 리더십이 중요하다.   이러한 정치적 시스템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자본주의는 언제나 나락에 떨어질 수 있는 취약한 경제 제도이다.


이스라엘의 불평등 지표(자료 : OECD, 2013)


이러한 슘페터의 관점에서 본다면 창조경제는 혁신, 기업가정신, 신용만으로는 부족하다.   새로운 기술의 적극적 수용도 필요하고, 기업가정신의 진흥도 필요하며, 자본시장의 개선도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예를 들어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창조경제를 국가 경제의 근간으로 내세운 후 중요한 참조 사례로 꼽히고 있는 이스라엘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흔히 ‘창업국가’, ‘스타트업의 천국’으로 알려진 이스라엘의 그림자는 이스라엘이 영국, 미국과 함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국가 중 가장 빠르게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된 나라 중 하나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위 표에서 보면 1990년대와 2000년대는 이스라엘이 디지털 혁명에 힘입어 글로벌 생산 체계의 연구개발에 전문화된 국가로 도약하는 단계에서 사회적 불평등이 어떻게 커지는지 보인다.   파란색 그래프는 OECD 평균이며, 빨간색 그래프는 이스라엘인데, 지니 계수, 상대적 소득 격차, 상위 10%와 하위 10%의 경제적 차이 등 모든 기준에서 봤을 때 이스라엘은 OECD 평균보다 상황이 안 좋고 그러한 추세가 지속되고 있다.   창업국가 이스라엘은 이런 나날이 심해지는 경제적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지속 발전할 수 있을까.
슘페터의 견해로는 어렵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불안정을 야기하고 그 불안정을 스스로 극복하면서 성장하는 생명체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건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정치적 안정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불평등의 확대는 이러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데 어려움을 주고, 결국은 장기적 경제 발전에 장애물이 된다.


궁극적으로는 이런 경제와 정치의 양면에 한 사회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는 슘페터의 문제의식은 창조경제의 본류인 미국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실리콘밸리가 지난 수 십년동안 애플, 구글 등 글로벌 ICT 산업의 판을 뒤흔든 기업을 만들어온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 개인용 컴퓨터와 인터넷 혁명이 시작됐고, 새로운 혁명이 또 다시 태어나고 있다.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의 전형적인 모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미국은 1970년대 이후 소득의 평균과 중간값의 격차가 나날이 증대되고 있고,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 그 정도가 더 심해지고 있다.
달리 말해, 경제가 호황이든 불황이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있고,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있다.   창조적 파괴가 새로운 부를 창출해주는 건 맞지만 자동으로 이런 사회적 모순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선 지속적으로 부를 창출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실리콘밸리의 사상적 리더 중 한 명이며, 저작권 개혁을 위한 시민단체인 크리에이티브 커먼즈의 공동 창설자 중 한 명인 하버드 로스쿨의 로렌스 레식 교수를 보자.   그가 사이버 공간의 법제 문제에서 이제는 미국 의회 개혁으로 관심사를 옮긴 이유도 이 때문이다.   평등의 문제를 배제하고서는 혁신도 지속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슘페터가 대한민국의 창조경제를 논한다면,   그가 다시 태어나 우리가 운좋게 그를 국가 경제 자문으로 모실 수 있다면,   그는 경제와 정치를 모두 봐야 할 것을 주문할 것이다.   그는 기업가 정신 없이는 성장이 없음을 강조하겠지만, 창조적 파괴가 본질적으로 ‘파괴’임을 역설할 것이다.   그는 또한 현재의 창조경제론은 미래의 ‘창조’만 논하고 있지, 그러한 과거의 ‘파괴’가 어떻게 이뤄져야 할 것이며, 그에 관련된 사회적 충격 완화는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뤄져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부재함을 지적할 것이다.
창조경제는 창조의 아름다움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거기엔 파괴의 추함도 있으며, 그것을 감수할 수 있는 사회적 용기와 능력과 합의가 필요하다.   섣불리 미국, 이스라엘 등 특정 국가를 모범사례로 삼고 모방한다고 해서 그런 결과가 오지 않는다.   이 지상에는 어느 곳에도 천국도 지옥도 없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올 뿐이다.


출처 - [ 글 : 김재연 ]




조지프 슘페터 Joseph Alois Schumpeter  1883 ~ 1950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비엔나대학에서 법률과 경제를 전공하고 1906년에 학위를 취득하였다. 1919년에는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재무장관을 역임하고 후에 비다만 은행장을 맡는 등 현실의 정치와 정책에 관계한 적도 있었지만 1925년 본 대학의 초빙으로 학구생활로 돌아갔으며 1933년에는 미국에 귀화하여 하버드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슘페터는 경제학자로서 그 이름과 업적이 알려져 있다. 그가 다룬 연구분야는 ‘신(新) 결합’이나 ‘창조적 파괴’라는 개념에 의해 기업을 대행인으로 하는 기술혁신이 현대의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독자의 동학(動學)적, 장기적인 경제이론을 주장하여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 받고 있다.
그의 저서 『자본주의ㆍ사회주의ㆍ민주주의 ; 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1942)는 자본주의의 존속 가능성을 옹호하면서 또한 마르크스 학설을 엄격하게 비판하면서도 향후 사회주의 정치체제로의 이행을 예측한다는 대담한 메시지를 정치학자들에게 던진 것이다. 단, 이 점에서의 슘페터의 예측은 적어도 현재까지의 시점에서는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자본주의ㆍ사회주의ㆍ민주주의』는 현대정치학에 그러한 예측과는 별도로 다른 하나의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것은 이 책 후반의 그의 민주주의에 관한 고찰이다. 슘페터는 우선 18세기까지의 민주주의 이론을 ‘고전적 민주주의 학설’이라고 명명하고 그것이 ‘공익’ 또는 ‘국민의 의지’의 존재라는 비현실적인 전제를 기초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아무리 그러한 것의 존재를 전제 할 수 있었다고 해도 그것들의 실현이 매우 곤란하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다음으로 슘페터는 민주주의를 ‘정치 결정(決定)에 도달하기 위해 개개인이 국민의 투표를 획득하기 위한 경쟁적 투쟁을 함으로써 결정력을 얻는 정치적 장치’라고 정의하고 유권자가 선거에 참여하여 정부를 구축하는 과정을 무엇보다 중시한 ‘다른 하나의 민주주의이론’을 전개하였다. 슘페터의 여기에서의 견해는 민주주의에 어떠한 ‘공익’의 실현을 기대하는 규범적인 민주주의 이해와는 명확하게 획을 긋는다는 의미에서 정치사상이나 정치철학의 계보에서와는 다른 경험실증주의적 입장에서의 민주주의 연구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사실 그의 이론은 후의 연구자들이 민주주의 하에서의 정치 과정을 분석하는 개별의 이론이나 가설을 구축하는데 있어서의 대전제로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예를 들면 후에 공간모델을 도입하여 정치학에 합리적 선택 패러다임의 기반을 구축한 다운스(Anthony Downs)는 자신의 입론(立論)의 기반이 모두 슘페터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고 드러내놓고 감사의 말을 하고 있다. 슘페터의 민주주의 이론은 소선거구제도나 다수결형의 의사결정을 옹호하여 엘리트주의적 또는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경우도 있다. 또한 슘페터의 정의에 의한 민주주의는 제도적인 측면에서 다른 민주주의와 명확하게 구별되지만, 민주주의에도 다양한 진전의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예를 들면 달(Robert Alan Dahl)과 같은 입장에서의 민주주의를 이해하면 극단적으로 단순하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재선을 목표로 하는 정치가, 득표 최대화를 목표로 하는 정당이라는 현대의 정치학에서 널리 채용되고 있는 전제(前提)나 지견(知見)이 슘페터의 민주주의 이론에서 유래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출처 - [ 21세기 정치학대사전, 2010.1.5, 한국사전연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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